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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천문화재단의 장르 논쟁과 논리파의 침묵 운영자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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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cymca.or.kr/bbs/bbsView/210/6482691

 

[시론] 인천문화재단의 장르 논쟁과 논리파의 침묵

 

인천일보 2015.01.06 

 

인천문화재단이 지원사업의 분류상에서 전통을 장르 구분에서 제외하였고, 이에 대해 전통예술계에서는 전통 영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결국 인천문화재단은 지원사업 공모에 전통을 장르로 추가하는 수정 공지를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통을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점에서 기존 장르의 언어적 정의로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통은 장르 외의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나 장르보다 큰 범주라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 전통은 장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동시에 전통을 장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르로 구분을 하는데 있어서 예술 장르로 구분한 것을 우선 배치해놓으면, 전통이라는 영역은 여러 장르에 걸쳐서 있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장르에 대한 논쟁이라고 한다면 문화재단의 원래 논리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논리적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단 내부에서는 쉽사리 전통을 장르로 넣어달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단이 재공지하면서 내놓은 이유는 현장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수렴한다는 제3의 논리였다. 그것은 의지, 권력, 정치의 영역이지 예술의 장르적 구분의 영역은 아니었다.

논쟁은 장르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실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논쟁을 논리적으로만 따지고 들려고 한다면 최종 결정된 결론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부딪히고 있는 실제적 본질을 살펴보자면 최종 결론이 옳았기에 문화재단의 수정은 잘한 셈이다.

본질이자 핵심은 한정된 문화 예산의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다. 파이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분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언표들만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곧 논리적이자 합리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가끔 드러난 언어 논리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논리파들이 나타나면서 논리적인 싸움을 걸어오곤 하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그 논리가 바로 도구적 이성의 예인 셈이다. 그 논리파들은 논리를 치밀하게 세우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논리 층위와 패러다임 안에 갇혀서 완결된 논리를 완성해낼 뿐이다. 정합적이고 논리적으로 완결된 논리 체계가 있더라도 끝이 아닌 것은 그 바깥의 또 다른 논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논리의 층위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그런 총체적 사고의 결론이 등장하지 못해도 다른 해결의 길이 있다. 의지적, 권력적 결정이 때로는 외면상의 논리적 결정보다 옳을 때도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권력적 층위에서 작동하며 이성과 논리의 한계를 극복해낸다. 현대 시대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논리 다원 체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일 논리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자면 '비극의 탄생'이다. 이 논리도 옳고 저 논리도 옳은 정의가 양립하는 사태이다. 과거처럼 단일 논리로 진리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앞선 사건에서 벌어진 논쟁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시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의 논점이 드러나고 제대로 토론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문제시할 일도 아니다. 명시적 논리는 엄밀하기는 하지만 총체적이지는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고질적인 문제와 논쟁들이 있다. 첫번째는 문화예술 예산의 절대적 양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예산의 배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는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배분의 문제는 피해자 간에 다툼을 만들어 와해하게 만든다. 궁극적인 답은 절대적 양을 확대하는 문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연대를 생각해서 논리파들은 이번 사건에서 침묵을 지켰다고 보아야 할까.

/차성수 인천YMCA 사무처장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5790 

인천문화재단이 지원사업의 분류상에서 전통을 장르 구분에서 제외하였고, 이에 대해 전통예술계에서는 전통 영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결국 인천문화재단은 지원사업 공모에 전통을 장르로 추가하는 수정 공지를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통을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점에서 기존 장르의 언어적 정의로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통은 장르 외의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나 장르보다 큰 범주라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 전통은 장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동시에 전통을 장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르로 구분을 하는데 있어서 예술 장르로 구분한 것을 우선 배치해놓으면, 전통이라는 영역은 여러 장르에 걸쳐서 있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장르에 대한 논쟁이라고 한다면 문화재단의 원래 논리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논리적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단 내부에서는 쉽사리 전통을 장르로 넣어달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단이 재공지하면서 내놓은 이유는 현장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수렴한다는 제3의 논리였다. 그것은 의지, 권력, 정치의 영역이지 예술의 장르적 구분의 영역은 아니었다.

논쟁은 장르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실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논쟁을 논리적으로만 따지고 들려고 한다면 최종 결정된 결론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부딪히고 있는 실제적 본질을 살펴보자면 최종 결론이 옳았기에 문화재단의 수정은 잘한 셈이다.

본질이자 핵심은 한정된 문화 예산의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다. 파이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분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언표들만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곧 논리적이자 합리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가끔 드러난 언어 논리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논리파들이 나타나면서 논리적인 싸움을 걸어오곤 하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그 논리가 바로 도구적 이성의 예인 셈이다. 그 논리파들은 논리를 치밀하게 세우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논리 층위와 패러다임 안에 갇혀서 완결된 논리를 완성해낼 뿐이다. 정합적이고 논리적으로 완결된 논리 체계가 있더라도 끝이 아닌 것은 그 바깥의 또 다른 논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논리의 층위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그런 총체적 사고의 결론이 등장하지 못해도 다른 해결의 길이 있다. 의지적, 권력적 결정이 때로는 외면상의 논리적 결정보다 옳을 때도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권력적 층위에서 작동하며 이성과 논리의 한계를 극복해낸다. 현대 시대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논리 다원 체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일 논리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자면 '비극의 탄생'이다. 이 논리도 옳고 저 논리도 옳은 정의가 양립하는 사태이다. 과거처럼 단일 논리로 진리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앞선 사건에서 벌어진 논쟁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시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의 논점이 드러나고 제대로 토론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문제시할 일도 아니다. 명시적 논리는 엄밀하기는 하지만 총체적이지는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고질적인 문제와 논쟁들이 있다. 첫번째는 문화예술 예산의 절대적 양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예산의 배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는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배분의 문제는 피해자 간에 다툼을 만들어 와해하게 만든다. 궁극적인 답은 절대적 양을 확대하는 문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연대를 생각해서 논리파들은 이번 사건에서 침묵을 지켰다고 보아야 할까.

/차성수 인천YMCA 사무처장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인천문화재단이 지원사업의 분류상에서 전통을 장르 구분에서 제외하였고, 이에 대해 전통예술계에서는 전통 영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결국 인천문화재단은 지원사업 공모에 전통을 장르로 추가하는 수정 공지를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통을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점에서 기존 장르의 언어적 정의로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통은 장르 외의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나 장르보다 큰 범주라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 전통은 장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동시에 전통을 장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르로 구분을 하는데 있어서 예술 장르로 구분한 것을 우선 배치해놓으면, 전통이라는 영역은 여러 장르에 걸쳐서 있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장르에 대한 논쟁이라고 한다면 문화재단의 원래 논리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논리적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단 내부에서는 쉽사리 전통을 장르로 넣어달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단이 재공지하면서 내놓은 이유는 현장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수렴한다는 제3의 논리였다. 그것은 의지, 권력, 정치의 영역이지 예술의 장르적 구분의 영역은 아니었다.

논쟁은 장르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실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논쟁을 논리적으로만 따지고 들려고 한다면 최종 결정된 결론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부딪히고 있는 실제적 본질을 살펴보자면 최종 결론이 옳았기에 문화재단의 수정은 잘한 셈이다.

본질이자 핵심은 한정된 문화 예산의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다. 파이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분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언표들만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곧 논리적이자 합리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가끔 드러난 언어 논리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논리파들이 나타나면서 논리적인 싸움을 걸어오곤 하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그 논리가 바로 도구적 이성의 예인 셈이다. 그 논리파들은 논리를 치밀하게 세우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논리 층위와 패러다임 안에 갇혀서 완결된 논리를 완성해낼 뿐이다. 정합적이고 논리적으로 완결된 논리 체계가 있더라도 끝이 아닌 것은 그 바깥의 또 다른 논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논리의 층위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그런 총체적 사고의 결론이 등장하지 못해도 다른 해결의 길이 있다. 의지적, 권력적 결정이 때로는 외면상의 논리적 결정보다 옳을 때도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권력적 층위에서 작동하며 이성과 논리의 한계를 극복해낸다. 현대 시대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논리 다원 체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일 논리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자면 '비극의 탄생'이다. 이 논리도 옳고 저 논리도 옳은 정의가 양립하는 사태이다. 과거처럼 단일 논리로 진리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앞선 사건에서 벌어진 논쟁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시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의 논점이 드러나고 제대로 토론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문제시할 일도 아니다. 명시적 논리는 엄밀하기는 하지만 총체적이지는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고질적인 문제와 논쟁들이 있다. 첫번째는 문화예술 예산의 절대적 양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예산의 배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는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배분의 문제는 피해자 간에 다툼을 만들어 와해하게 만든다. 궁극적인 답은 절대적 양을 확대하는 문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연대를 생각해서 논리파들은 이번 사건에서 침묵을 지켰다고 보아야 할까.

/차성수 인천YMCA 사무처장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인천문화재단이 지원사업의 분류상에서 전통을 장르 구분에서 제외하였고, 이에 대해 전통예술계에서는 전통 영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결국 인천문화재단은 지원사업 공모에 전통을 장르로 추가하는 수정 공지를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통을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점에서 기존 장르의 언어적 정의로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통은 장르 외의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나 장르보다 큰 범주라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 전통은 장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동시에 전통을 장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르로 구분을 하는데 있어서 예술 장르로 구분한 것을 우선 배치해놓으면, 전통이라는 영역은 여러 장르에 걸쳐서 있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장르에 대한 논쟁이라고 한다면 문화재단의 원래 논리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논리적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단 내부에서는 쉽사리 전통을 장르로 넣어달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단이 재공지하면서 내놓은 이유는 현장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수렴한다는 제3의 논리였다. 그것은 의지, 권력, 정치의 영역이지 예술의 장르적 구분의 영역은 아니었다.

논쟁은 장르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실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논쟁을 논리적으로만 따지고 들려고 한다면 최종 결정된 결론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부딪히고 있는 실제적 본질을 살펴보자면 최종 결론이 옳았기에 문화재단의 수정은 잘한 셈이다.

본질이자 핵심은 한정된 문화 예산의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다. 파이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분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언표들만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곧 논리적이자 합리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가끔 드러난 언어 논리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논리파들이 나타나면서 논리적인 싸움을 걸어오곤 하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그 논리가 바로 도구적 이성의 예인 셈이다. 그 논리파들은 논리를 치밀하게 세우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논리 층위와 패러다임 안에 갇혀서 완결된 논리를 완성해낼 뿐이다. 정합적이고 논리적으로 완결된 논리 체계가 있더라도 끝이 아닌 것은 그 바깥의 또 다른 논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논리의 층위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그런 총체적 사고의 결론이 등장하지 못해도 다른 해결의 길이 있다. 의지적, 권력적 결정이 때로는 외면상의 논리적 결정보다 옳을 때도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권력적 층위에서 작동하며 이성과 논리의 한계를 극복해낸다. 현대 시대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논리 다원 체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일 논리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자면 '비극의 탄생'이다. 이 논리도 옳고 저 논리도 옳은 정의가 양립하는 사태이다. 과거처럼 단일 논리로 진리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앞선 사건에서 벌어진 논쟁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시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의 논점이 드러나고 제대로 토론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문제시할 일도 아니다. 명시적 논리는 엄밀하기는 하지만 총체적이지는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고질적인 문제와 논쟁들이 있다. 첫번째는 문화예술 예산의 절대적 양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예산의 배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는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배분의 문제는 피해자 간에 다툼을 만들어 와해하게 만든다. 궁극적인 답은 절대적 양을 확대하는 문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연대를 생각해서 논리파들은 이번 사건에서 침묵을 지켰다고 보아야 할까.

/차성수 인천YMCA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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